칼럼 에세이

자라 (송건호)
  • 날짜 : 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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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라는 바다짐승은 편리한 목을 가지고 있다. 안전하다고 볼 때는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다가도 위험을 느끼면 어느새 쑥 목을 움츠리고 만다. ‘자라’는 특히 위험을 느끼는 눈치가 빠르다. 아무리 주위의 사람들이 목을 빼라고 졸라도 위험을 느끼는 이상 결코 목을 내미는 법이 없다.
  신문기자들이 ‘용기가 없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라’생각이 난다. 5·16 후로 신문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많다. 독자가 말하는 ‘재미’가 무엇을 바라는 마음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박 의장도 기자들이 “기개가 없다”고 말하고, 윤 대통령도 10일 “신문이 지나치게 소심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자라’의 경우라면 목을 빼도 상관이 없겠는데 왜 움츠리고만 있느냐는 꾸지람인 것 같다. 신문에 용기를 바라는 주위의 소리가 요란한데 기자들이 공연히 위축하고 있는 것이라면 스스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목을 빼지 않은 ‘자라’만을 나무랄 수는 없다. ‘자라’도 실상은 목을 길게 빼고 바깥공기도 쐬고 싶고 동서경치도 감상하고 싶을 것이 틀림없다. ‘자라’인들 궁상맞고 답답하게 움츠리고만 있고 싶을 까닭이 없다. 문제는 왜 ‘자라’가 움츠림을 펼 줄 모르냐에 있다.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사회에는 반드시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 비판의 책임을 떠맡은 기관이 바로 ‘의사당’과 ‘신문’이다. 따라서 ‘의사당’의 기능이 정지되고 있는 사회일수록 ‘신문’이 ‘의사당’의 몫까지 떠맡게 되니, 신문의 책임이 더욱 커진다. 비판을 싫어하는 ‘정치’는 독선으로 기울기 쉽다.
  자기가 하는 일만이 옳고 자기 이외의 의견은 모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민주정치는 위기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여론은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간다. 여론이 지하로 들어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위장된 여론이 판을 친다.
위장된 환영의 태극기 속에 파묻혀 이 박사는 민중과 점점 유리되어 갔다. 정치가 민중으로부터 유리되는 위험을 막는 유일한 방패는 자유스러운 신문의 비판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1962. 3. 12)


송건호 전집17 <현실과 이상>,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