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에세이

노블레스 오블리지 (선우휘)
  • 날짜 : 2017-05-22
  • 조회수 : 466

선우휘-노블레스 오블리지


<높은 신분에는 도의적인 의무가 따른다>


2중 국적 시비

  「사회 지도층의 2중 국적 보유 문제는 기강의 차원에서 다스려야 합니다. 의식의 바탕에 무국적 상태가 깔려 있는 이중국적자들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중 국적자들의 행동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는 자명한 것입니다.」

  이상은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김윤한 의원이 지적한 점이다. 이중 국적자들은, 언제든지 국가 현실에서 발을 뺄 준비가 되어 있는 <두 얼굴>로서, 좀더 분명히 말하면 베트남 패망의 사이공 꼴이 되면 쉽게 훌렁 외국으로 달아날 수 있으니, 국가 현실에 책임을 지는 사회 지도층으로서는 곤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회 지도자들을 국민이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어떻게 믿고 따를 것이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몇 년 전 이민 여권을 가진 사회 지도층에게 그 여권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지도층의 지위를 포기하겠느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던 때가 생각난다. 대개는 이민여권을 포기한 것으로 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자제들이 모두 미국 가서 사는 경우 부득이 노후를 거기서 마쳐야 하는 분들 가운데는 별 생각 없이 2중 국적을 가지게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분으로, 한국에서 한자리 할 때, 사정은 달라진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 꿩 먹고 알 먹느니 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 꾸욱 한국에 눌러 앉아 꿈에도 이민 갈 생각 않고 이 땅에 사는 국민들을 뭘로 아느냐. ㅡ 소박한 항변은 대게 그런 것일 것이다.

  한말에 서재필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미국 시민권을 갖고 다시 돌아와 독립 협회에 가담하여 독립신문을 만들며, 나라의 독립과 민권을 위해 싸울 때, 미국 국적이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리하게 작용한 것도 사실이었다.

  단적으로, 서재필은 어디 사람이냐는 것과 미국 국적자로서 그만큼 안전하게 신분이 보장되어 있다가 두 가지 점이 둥지들이나 일반 국민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고, 그에게 심리적인 거리를 두게 했던 것이다.

  그는 해방 후의 미 군정 때, 하지 중장의 초청을 받고 와서 고문을 지내다가 매사가 여의치 않고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훌쩍 돌아가 버렸지만, 만약 그에게 미국 국적이 없었더라면, 이 땅에 남아 죽기를 각오하고, 좌익이나 이승만 박사와 대결함으로써 해방사(海防使)를 좀더 달리 놓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도층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를 엄격히 다스려야 할 것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흐리멍덩한 입장에 자기를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 이 구덩, 저 구덩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영국의 귀족들

  한번 원칙을 세우면 그 윤리적 전개의 궤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말과 행동으로 일관하여 그 길이 막히면 그때 거기서 죽는 것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좌우의 이데올로기 가리지 않고, 진정한 지도층으로 불려지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 해방 전은 몰라도, 해방 후에 만이라도, 그런 지도층이 많았더라면, 6·25도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고, 3·15 부정 선거도 없었고, 4·19도 일어나지 않았고 10·26 사태도 생기지 않았고, 오늘과 같은 일부 학생들의 전천후 데모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사람인 이상, 살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할까마는 지도층이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도층은 지도층이고, 지도층으로서 인정받는 것이지 지도층으로 대접은 대접대로 받고 그 지위를 이용해 <무슨 짓>인들 못할 게 없다면, 그건 지도층이 아니다. 애국을 한다며 돈을 모으니까, 애국이란 말의 가치가 떨어지고, 일부 학생들은 애국이란 좋은 말조차 기피하려 드는 것이다.

  나는 외국말을 싫어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꼭 이 말 한마디만은 알아두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라는 것이다. 블란서 말에서 온 영어 같은데, 사전에는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의상의 의무>로 풀이되어 있다.

  높은 사람에게는 그 신분만큼의 도의적 의무가 따른다는 것이다. 영국이나 유럽의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의무로 생각되는 그 미덕은, 평상시는 물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영국 귀족이라고 하는데, 전쟁만 나면 이튼 할로의 명문 고등학교나 옥스퍼드 같은 명문 대학을 나온 귀족들은 일반 국민보다 앞장서서 전쟁터로 나가 싸웠다는 것이다

  나는 제 2차 대전 당시의 외무 장관이요, 전후의 수상을 지낸 이든 수상의 전기에, 영국에 그와 비슷한 나이에 유능한 정치가가 아주 적었던 것은 그 연배들이 제 1차 대전 때 가장 젊은 세대로서 맨먼저 지원해 나가 대개가 전사한 때문이라는 구절을 보고, 전신에 소름이 스치는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제국주의 영국이지만, 현대의 <로마>가 괜히 생긴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의 젊은 귀족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정신을 죽음으로 증명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영국 귀족은 서민의 인정을 받았고 원망과 비방을 받는 일은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뽑힌 자에게 따르는 의무는 영국인에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6·25 당시 나는 <라이프>잡지에 난 미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졸업생 특집을 보고, 이든 수상의 전기를 보았을 때만큼 감동했었다.


키와 마타크

  거기에는 수십 명 젊디젊은 소위들의 사진이 나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그 해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하고 한국 전선에 소대장으로 투입되어 전사한 젊은이들이었다. 펜타곤은 그해 졸업생이 일선 소대장으로 더 많이 희생될 것을 걱정해 비교적 안전한 후방 근무로 돌렸다는 기사가 말미에 실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외국 뉴스를 보면, 월남전의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을 둘러싼 재판에 전 부통령이요 장군이었던 쿠엔 카오 키가 증인으로 나갈 것이라고 한다. 국민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가 식당을 경영한다는 쿠엔 카오 키.

  거기서 나는 캄보디아가 패망할 때, 미국의 고위층 정치인의 권유가 보장을 물리치고 <이만큼 살았으면 오래 살았다>며 미국 피난을 거절하고 <나는 내 조국 땅에서 죽겠다>며 미국 피난을 거절하고 <나는 내 조국 땅에서 죽겠다>며 끝내 남아서 공산군에게 학살당한 마다크 (전 수상)씨를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서 오명을 남기기보다, 죽어서 명예를 지키는 것이 지도자가 최후까지 지킬 수 있는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의적인 책임>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언제나 죽을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정적인 때에 가서 죽는 것은 애꿎은 국민들인 것이다.

  가족들만 안전한 외국에 가 있다면, 자기 하나쯤 조국 땅을 지키다 만일의 경우 죽어 묻혀도 여한이 없을 듯싶은데, 인간의 욕심이란 이렇게 한이 없는 법인가.

  그래도, 우리의 역사를 들춰 보면, 비록 정치나 국방은 시원치 않게 하면서도 국난을 맞아서는 죽음을 각오했고, 실제로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선비는 많았는데, 그래서 국민들은 그들을 따라 의병으로 싸웠는데, 어째 지금은?

  지도층의 2중 국적도 다른 경우나 마찬가지로 극히 일부의 일일 테지ㅡ.

선우휘 <아버지의 눈물>, 동서문화사